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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왜 우리는 의미 없는 일에 의미를 부여할까 - 현대인의 부조리와 카뮈

2026-05-27 · 읽는 시간 13

카뮈의 부조리와 현대인의 의미 추구 — 시지프의 바위와 반복되는 일상의 겹침

어느 평일 저녁,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오늘 한 일이 무슨 의미가 있었지" 하고 묻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다. 보통은 졸음이 그 질문을 덮어버리고, 다음 날 알람이 울리면 다시 같은 리듬으로 출근한다. 이 글은 그 질문이 잠깐 깨어 있는 자리에서 시작한다.

같은 질문을 알베르 카뮈는 1942년 『시지프 신화』의 첫 페이지에 박아 두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격한 문장이지만 의도는 격하지 않다. 인생이 살 만한지 아닌지 판단하는 일이 철학의 근본 문제라는 말, 곧 매일 일어나야 할 이유를 묻는 일이 가장 무거운 문제라는 뜻이다. 한국 독자가 흔히 떠올리는 '인생은 허무하다'와 카뮈의 부조리는 같지 않다. 정답을 내놓을 생각은 없다. 다만 조금 다르게 보는 방법 정도는 있다.

부조리는 허무가 아니다


카뮈의 부조리(l'absurde)는 세계의 속성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관계를 가리키는 단어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부조리는 인간의 부름과 비합리적인 세계의 침묵 사이의 대결에서 태어난다. (L'absurde naît de cette confrontation entre l'appel humain et le silence déraisonnable du monde.)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1942)

부르는 쪽은 인간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의미를 묻고, 이유를 찾고, 까닭을 갈망한다. 그런데 세계는 그 부름에 대답하지 않는다. 침묵하는 세계가 잘못된 것도 아니고, 묻는 인간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다만 그 둘 사이에서 어긋남이 발생한다. 카뮈는 그 어긋남 자체를 부조리라고 불렀다.

세계가 비합리적이라서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비합리적인 세계에 합리를 요구하는 인간이 있기 때문에 부조리가 생긴다. 부조리는 어느 한쪽이 아니라 그 둘 사이의 충돌에 있다. 이 구분이 사소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놓치면 카뮈는 곧장 허무주의자로 오해받는다. 한국에서 '부조리'가 종종 '말도 안 되는 상황' 혹은 '인생은 허무하다'는 뜻으로 흘러가는 이유도 비슷하다. 카뮈는 명시적으로 그쪽을 거부한다. 그가 보기엔 의미가 없다는 사실 자체가 결론이 아니라, 그 사실을 직시한 채로 어떻게 살 것인가가 진짜 질문이다.

1942년의 일상, 2026년의 출근


『시지프 신화』가 의미 없는 직장인의 책으로 자주 읽히는 데에는 한 단락의 영향이 크다.

기상, 전차, 사무실이나 공장에서의 네 시간, 식사, 전차, 다시 네 시간의 일, 식사, 잠, 그리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이 같은 리듬으로…

— 같은 책

이 단락은 카뮈의 묘사인 동시에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다. 전차가 지하철과 셔틀로 바뀌었고, 네 시간씩 두 번이 여덟 시간 풀데이로 합쳐졌을 뿐이다. 카뮈가 흥미롭게 다룬 것은 이 단조로움 자체가 아니라, 어느 날 이 리듬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왜?"가 솟구치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왜"를 의식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단조로움이 적이 아니라, 그 위에 떠오르는 질문이 출발점이라는 뜻이다.

2026년의 통계로 옮겨 보면, 우리가 떠올리는 그 "왜?"의 기반은 카뮈 당시보다 더 두텁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취업자 기준 1,872시간으로 OECD 38개국 중 6~7위 수준이고, OECD 평균(1,742시간)보다 약 130시간이 길다. 주 50시간 이상 일하는 장시간 노동자 비율은 17.7%로 OECD 평균 12.9%를 크게 웃돈다. 카뮈가 묘사한 같은 리듬으로 이어지는 요일이 한국에서는 평균보다 130시간 더 길게 펼쳐지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카뮈는 노동시간의 길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가 짚은 것은 길이가 아니라 반복이고, 반복 자체보다 반복 속에서 의식이 깨어나는 순간이다. "왜?"라는 질문이 솟으면 두 가지 길이 갈린다. 그 질문을 다시 잠들게 두거나, 그 질문 위에서 깨어 있는 채로 살아내거나. 한국 직장인의 대답은 대체로 첫 번째다. 알람이 다시 울리고, 출근하고, 점심을 먹고, 회의에 들어가고, 다시 알람을 맞춘다. 그 자체를 비난할 수 없다. 다만 그 사이사이에 솟는 "왜?"를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는지가 다음 챕터로 연결된다.

의미를 만들려는 시도가 도피가 될 때


카뮈는 부조리 앞에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응답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물리적 자살이다. 부조리를 제거하지만 그것 역시 부조리에 대한 도주다. 둘째는 카뮈가 철학적 자살(suicide philosophique)이라고 부른 길이다. 종교·이데올로기·미래의 희망 같은 것에 도약해 부조리 자체를 덮어버린다. 키르케고르나 셰스토프가 신앙으로 부조리를 뛰어넘으려 한 시도를 카뮈는 정확히 이 이름으로 거부했다. 셋째가 그의 답이다. 부조리를 직시한 채로 살아낸다. 그는 이것을 반항(révolte)이라 불렀다.

여기서 갓생 이야기를 끌어와 본다. 카뮈의 철학적 자살은 종교적 도약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부조리를 직면하지 않으려고 어떤 체계·이상·미래의 약속에 자신을 던지는 모든 행위가 그 범주에 든다. 갓생이라는 단어를 그 위에 겹쳐 보면 묘한 그림이 나온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영어를 외우고, 자격증을 따고, N잡을 굴리고, 사이드 프로젝트를 돌린다.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 의미를 생산하는 활동으로 빈자리를 덮어버린다. 카뮈의 어휘로는,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도약이다.

통계는 그 도약이 실패하는 자리를 보여준다. 국가데이터처 『청년 삶의 질 2025』에 따르면 19~34세 청년의 32.2%가 번아웃을 경험했고, 25~29세에서는 그 비율이 34.8%까지 올라간다. 오픈서베이 『대학생활 2025』에서 대학생 63.1%가 갓생을 실천한다고 답한 동시에, 같은 표본의 53.6%가 번아웃을 호소했다. 갓생을 하는 비율과 번아웃을 겪는 비율이 거의 같다. 갓생의 절반 이상이 번아웃으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언론사 인터뷰에 등장하는 한 줄들은 그 통계의 안쪽을 보여준다. 한 청년은 "해야 할 일은 모두 해내고 있지만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고, 또 다른 인터뷰에는 "하루를 바쁘게 보내도 끝내면 공허하다"는 문장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 한 줄이 갓생의 구조를 가장 정확하게 요약한다.

쉬고 있으면 불안하고, 생산적이지 못한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 청년 인터뷰, 청년일보 2025

쉼이 불안과 죄책감으로 처리된다는 것은, 쉼이 이미 노동의 일부가 되었다는 신호다. 유튜버 유네린이 한 매체에서 던진 짧은 문장은 그 신호를 보다 직설적으로 받아낸다.

나는 '갓생' 사는 줄 알았는데 그냥 과로하고 있었다.

— 유튜버 유네린, 경향신문 2024.1.19

같은 기사에서 사회학자 김수명은 한국 사회에서 근면은 경제개발의 '마법의 키워드'였지만 휴식은 게으름으로 정의된다고 정리했다. 이 문장을 카뮈 위에 얹으면 이렇게 읽힌다. 한국 사회는 부조리를 직시하지 못하도록 설계된 측면이 있다.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들 때마다 더 생산적인 활동으로 그 감각을 덮어쓰는 회로가 작동한다.

이 회로의 다른 이름을 한병철은 자기착취라고 불렀다. 그가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에서 정리한 핵심은, 우리가 사는 사회가 더 이상 규율사회가 아니라 성과사회라는 것이다. 외부에서 명령하는 강제가 사라진 자리에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부과하는 강제가 들어선다. 성과주체는 자유롭게 자기를 채찍질하고, 그 자유의 한가운데에서 폭력으로 돌변한다. 갓생의 새벽 5시는 누구도 강요한 적이 없는 시간이지만, 뒤처지지 않기 위한 시간이라는 점에서 이미 자유롭지 않다.

카뮈의 철학적 자살과 한병철의 자기착취는 같은 현상을 두 각도에서 본 것이다. 카뮈는 부조리에서 도망치려는 도약에 주목했고, 한병철은 그 도약이 어떻게 자기에게 폭력으로 돌아오는지를 보여줬다. 그래서 갓생을 비난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새벽에 일어나 운동하는 것 자체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다만 그 행위가 "왜?"라는 질문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때, 카뮈식으로도 한병철식으로도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시지프는 행복하다


여기까지 오면 답답해진다. 의미를 만들려 하면 철학적 자살이고, 만들지 않으면 허무에 빠지지 않느냐는 반문이 생긴다. 카뮈의 결론은 의외로 단순하다. 부조리를 직시한 채로 그래도 산다. 그것이 그가 말한 반항이다.

그가 시지프 신화를 끌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지프는 신들이 내린 형벌로 영원히 바위를 산 정상까지 굴려 올린다. 정상에 닿는 순간 바위는 굴러떨어지고, 그는 다시 내려가 바위를 굴리기 시작한다. 의미 없는 노동의 가장 완벽한 그림이다. 카뮈는 이 시지프에게 행복을 돌려준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La lutte elle-même vers les sommets suffit à remplir un cœur d'homme; il faut imaginer Sisyphe heureux.)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결론부

이 문장을 가볍게 읽으면 자기위안처럼 들린다. 그러나 카뮈가 가리키는 행복은 위안이 아니다. 의식의 전환이다. 시지프는 바위가 굴러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행복한 것이 아니다. 정확히 그 사실을 알고도, 다시 내려가는 그 순간에 자신의 발걸음을 의식하는 사람으로서 행복한 것이다. 카뮈가 다른 곳에서 "경멸로 극복되지 않는 운명은 없다"고 적었을 때, 그 경멸은 운명을 깔보는 것이 아니다.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자세, 운명을 받아들이되 그 위에서 자신의 동작을 선택하는 자세다.

시지프가 바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순간, 형벌은 받아내는 행위로 바뀐다. 의미가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대로지만, 의미 없음의 한가운데를 자기 동작으로 통과한다. 카뮈는 부조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준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부조리는 해방시키지 않는다, 묶는다"고 적었다. 부조리를 인식한 뒤에도 출근은 남고, 회의는 남고, 마감은 남는다. 다만 그 위에 어떤 자세로 앉을 것인가가 달라진다.

이것이 갓생과 결정적으로 다른 자리다. 갓생은 의미 없음을 덮기 위해 더 많은 활동을 끌어다 쌓는다. 카뮈의 반항은 의미 없음을 인정한 채로 같은 활동을 다른 자세로 한다. 외부에서 보면 차이가 안 보일 수도 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시각에 출근하고 같은 일을 한다. 다만 그 안의 의식이 다르다.

마무리


카뮈의 답은 '의미를 만들어내라'도 아니었고 '의미가 없으니 다 놔라'도 아니었다. 의미 없음을 직시한 채로 자기 하루를 자기 것으로 받아낸다는 제3의 자리였다. 갓생과 번아웃은 같은 동전의 양면일 수 있다. 의미를 너무 만들려 한 결과, 의미를 만들지 못한 자기 자신에게 무너지는 구조다. 카뮈가 돌려주는 것은 그 사이의 빈자리에 잠시 머무를 권리다.

물론 카뮈가 모든 답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빅터 프랭클은 다른 길을 가리켰다. 그는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라 보았고, 일·관계·고통 앞에서 취하는 태도라는 세 경로를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카뮈는 의미가 본래 없는 것이라 보았고, 그 부재 속에서 반항으로 살아낸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결론은 다르지만, 둘 다 갓생식 '의미의 대량생산'과는 거리가 있다. 의미를 만드는 것과, 의미를 발견하거나 의미 없음을 받아내는 것은 다른 방향의 동작이다.

올리버 버크먼은 『4000주』에서 80년을 산다고 가정해도 약 4,000주뿐이라고 적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생산성에 매달릴수록 시간은 더 분주해지고, 생산성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지향해야 할 것들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카뮈가 반항이라는 단어로 정리한 자리와, 버크먼이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단어로 옮긴 자리는 어느 지점에서 만난다. 의미는 우리가 더 많은 활동을 쌓는다고 늘어나는 자원이 아니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오늘 한 일이 무슨 의미가 있었지" 하고 물을 때, 그 질문을 곧장 갓생으로 덮을 수도 있고, 허무로 끌고 갈 수도 있다. 카뮈가 가리킨 길은 그 둘 사이의 좁은 자리다.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결론을 내지 않은 채로, 그래도 내일 아침 같은 시간에 다시 책상에 앉는 자리. 어쩌면 그것이 시지프가 행복했던 자리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바위는 무엇이고, 당신은 그것을 어떤 자세로 받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참고